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뮌헨 협정 (문단 편집) == 결과 == ||<-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2px-Munich_Agreement_map_ko.svg.png|width=100%]] || || 순서 || 연도 || 내용 || || 1 ||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흡수된다. || || 2 || [[1938년]] [[10월 2일]] ||테셴이 폴란드에 합병된다.[* 이후 1938년 12월 1일에는 슬로바키아-폴란드 국경의 일부 지역이 추가로 폴란드에 흡수되었다.[[http://en.wikipedia.org/wiki/First_Vienna_Award|참고 1]][[http://en.wikipedia.org/wiki/Munich_Agreement|참고 2]][[http://en.wikipedia.org/wiki/Polish%E2%80%93Czechoslovak_border_conflicts|참고 3]] ] || || 3 || [[1938년]] [[11월 2일]]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토는 헝가리에 흡수된다. || || 4 ||<|3>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산맥에 존재하는 루테니아 지역은 따로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로 독립되었으나,[br]얼마 뒤 헝가리에 의해 무력으로 병합된다. || || 5 ||[[체코]]의 나머지 국토는 전부 독일의 직할 보호령이 된다.([[보헤미아]], 모라비아가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보호령]]으로 전락) || || 6 ||[[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독립국]]으로 [[괴뢰국|유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H13160%2C_Beim_Einmarsch_deutscher_Truppen_in_Eger.jpg|width=600]] 주데텐란트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나치식 경례]]로 맞이하는 주데텐란트의 여성들. 눈물을 흘리는 여인과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사진속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을 두고 기쁨에 감격하는 모습이라는 것과 혹은 병합에 반대하지만 나치의 탄압이 두려워 경례는 하면서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대부분 친나치 성향이었고 독일군의 존재가 싫어서 울고 있었다면 애초에 행렬 맨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 대체로 기뻐서 우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파일:1319836165813820708.jpg|width=600]] 데이비드 로우[* [[폴란드 침공]] 문서의 풍자화를 그린 사람이다.] 화백의 풍자화. [[아돌프 히틀러]]에게 [[나치식 경례]]로 화답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에두아르 달라디에]], [[네빌 체임벌린]]. [[파일:이거다거짓말인거아시죠.png|width=600]] >[[네빌 체임벌린|한 남자]]가 [[대영제국|우리]]를 [[제2차 세계 대전|최대의 전쟁]]으로부터 [[그런 거 없다|구하다]]! >---- >1938년 8월 30일,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연설 소개 문구. [[파일:Kf4i3S5r.jpg|width=600]]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녹색 작전|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전쟁]]을 겪을 것이다. >---- >[[윈스턴 처칠]], 1938년 평화를 지켰다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들고 있는 종이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 [[서명]]이 담긴 서약서다. [[다우닝 가 10번지]] 앞의 기자들 앞에서 이 종이를 흔들면서 체임벌린은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우리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 총리가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임을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집에 가서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라고 외쳤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탄하여 이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결과 유럽은 '''고작 6개월 동안''' 평화를 맛보았다. 6년도 아니다. '''6개월이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협박해서 체코를 통째로 먹어치우고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슬로바키아를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배신당한 충격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지탱하는 대규모의 공업시설[* 주데텐란트를 잃으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강철 생산량의 70%와 전력 생산량의 70%를 상실했다.]과 막대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던 주데텐란트, 300만에 달하는 인구까지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게다가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아서 체코가 독일의 직할 보호령으로 전락하고 슬로바키아가 [[괴뢰국]]이 된 직후 이웃에 있던 헝가리가 슬로바키아 동부를 침공하여 동부 국경 지대의 영토 일부를 추가로 빼앗기까지 했다.[[http://en.wikipedia.org/wiki/Slovak%E2%80%93Hungarian_War|참고]] ||[youtube(rofmja5WGqA)]|| || 주데텐란트를 방문해 독일계 주민들의 환영을 받는 히틀러 || > [[히틀러]]는 [[프라하]]를 차지하기 앞서 서방 열강을 우습게 보았다. 이번에도 [[영국]]과 [[프랑스]]가 말로만 떠들고 행동은 못하리라는 히틀러의 짐작은 맞았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나타낼 반응을 히틀러가 오판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증거가 참 많다. 경고를 여러 번 받기는 했지만 히틀러가 막상 뮌헨 협정을 파기하니까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충격과 당혹에 휩싸였다. 체코슬로바키아란 나라가 무너지면서 영국의 유화책도 깨졌다. 히틀러는 더는 영토 요구를 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뜨렸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복은 히틀러의 정책 목표가 독일 민족을 단일 국가로 통합하는 것이라는 논리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긴 했지만 히틀러는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확실해졌다. 3월 17일 버밍엄 연설에서 체임벌린은 새로운 정책을 암시했다. '''"이것은 소국을 겨눈 마지막 공격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공격이 잇따를까요?"''' 체임벌린은 물었다. '''"이것은 사실상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려고 내딛은 걸음일까요?"'''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두고 분열되었던 나라의 국론을 통일시켰다. 영국 국민은 한 목소리로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군대 지원하는 사람이 갑자기 늘었다. 정부도 국민도 이제는 히틀러를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 > 이안 커쇼 히틀러 2권 (p. 236) >'''"[[폴란드 침공|이 참극]]을 일으킨 책임은 [[아돌프 히틀러|한 사람]]의 어깨에 있다."'''고 [[네빌 체임벌린|체임벌린]]은 9월 1일 영국 하원에서 말하면서 '''"[[아돌프 히틀러|무분별한 개인적 야심을 채우려고 세상을 도탄에 빠뜨린 독일 총리]]"'''를 규탄했다. 이 표현은 지나친 단순화지만 그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렇게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야 히틀러가 자신의 행동으로 유럽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특이한 권력의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방조한,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저지른 태만과 불찰의 죄를 슬쩍 빼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 >국제적으로 히틀러의 협박과 공갈이 먹혀든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판도가 그만큼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공갈꾼의 노다지''''였다. 그것은 자꾸만 요구 조건을 키우는 빌미를 히틀러에게 주었고 1938년과 1939년에는 극에 달했다. 민족 관계가 불안해진 것도 결국 전승국들이 일방적으로 영토를 갈랐기 때문이었고 히틀러는 중유럽과 동유럽이라는 인종의 가마솥에서 그것을 이용했다. 또 서방, 특히 영국은 전쟁 배상금을 너무 과하게 물린 데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히틀러가 악다구니를 쓰고 과장을 하는 것도 사실이고 히틀러의 방식이 역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히틀러가 하는 주장이 다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영국이 프랑스보다 더 그런 편이었지만 서방 국가들은 전쟁에 지친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새로운 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 들었고 기존의 점잖은 외교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거짓말과 위협을 밥 먹듯이 하는 히틀러에게 끌려다니면서 히틀러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럴수록 공갈꾼의 요구 조건은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서방 국가들이 히틀러의 실체를 알아차렸을 때는 그들은 이제 더는 '미친개'를 꿇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 > 이안 커쇼 히틀러 2권 (p. 295) 이 사건은 소련의 외교 방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소련은 당시 체코와 공동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고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의 주도로 이를 확대하여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아우르는 4자 집단 안보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영프의 방관 속에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보자(소련군을 체코에 진주시키려 했으나 폴란드-루마니아가 거부했다. 그 대가로 폴란드는 분할당했고 루마니아는 독일의 종속적 동맹국으로 추축 멤버가 되었다가 종당엔 패전국이 된다) 영-프를 믿지 못하게 되었으며 영-프 쪽에서도 매우 소극적이었고 폴란드 역시 소련과 방위 조약을 맺는 것을 극력 거부해서 결국 히틀러와의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폴란드는 볼셰비키가 서쪽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겪었고 뮌헨 협정 당시는 이 전쟁이 끝난 지(1921년) 2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대대로 쌓인 민족 감정까지 겹치면서 소련을 불신하게 된 것이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했고 이 결과가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에는 [[윈스턴 처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했으나 1년 후에는 누구나 이 협정이 외교적 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던 영국-프랑스는 1년 후에도 히틀러에게 똑같은 수에 당했고 체코를 포기함으로써 그를 달래 보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기는커녕 또 똑같은 수법으로 폴란드를 협박했고 폴란드가 체코처럼 굴복하지 않자 [[폴란드 침공|무력으로 침공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 조약으로 독일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체임벌린부터 앞에선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으나 뒤에선 맹렬히 재무장을 시작했고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즉 영프를 위시한 연합국의 의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해서 평화를 얻기보다는 독일에게 체코슬로바키아를 던져주고 그를 소화시키는 동안 군비를 비축하고 다른 나라(미국 등)를 끌어들이는 등 전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 목적이었다. 다만 애초에 벌 수 있으리라 보았던 2년은커녕 단 6개월도 못 벌었으니 완전한 외교적 실패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국내정치적 기반을 아주 튼튼하게 해준 외교 성과였는데 원래 독일 군부는 나치 정부를 탐탁치 않게 여겨 쿠데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강대국을 상대로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체코 삼연타석 외교 홈런을 치면서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까지 갔다. 그나마 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의 인식이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서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파기하자 '''"이제 전쟁은 불가피하다."''' 로 바뀌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사건은 외견상 무관해 보였던 [[스페인 제2공화국]]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당시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내전 초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열강들이 모여 비동맹,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포르투갈 제2공화국]]은 대놓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친[[파시스트]] 진영에게 돈과 무기, 병사를 다스로 퍼주고 있었고 소련도 반대쪽에서 공화파 진영에 지원을 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좌파 [[인민 전선]] 출신의 레옹 블룸의 프랑스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까운 공화국에게 지원을 해주려고 했으나 동맹국인 영국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좌초되었다. 결국 내전 내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바로 아래에서 대대적인 이념 전쟁이 벌어지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공화국을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며 영국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지경이었다. 그러나 뮌헨 회담에서 이미 프랑코 진영의 승세가 유력해지는 걸 본 영국 측에서 [[스페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손을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쟁 내내 공화국이 추구하던 외교적 승리는 무산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